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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설악119구조대 "10월은 잔인한 달"
작성자
속초소방서
등록일
2009-10-27
조회수
800
내용

24일 오전 10시, 강원도 속초 설악산 등산로 입구. 작년에 비해 1~2주 늦은 단풍이 산자락까지 절정을 이루고 있었다. 이달 들어 70만명이 단풍을 찾아 설악산에 올랐다. 울긋불긋 하늘을 가린 ''단풍 터널''을 지나는 가을 여행객들을 바라보는 설악119산악구조대 대원들의 얼굴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언제라도 터질 수 있는 출동 요청 때문이다.

 

"구조출동! 구조출동!"

 

  오전 11시19분쯤, 긴급 지령이 떨어졌다. 대원 셋이 응급처치 장비가 든 가방을 챙겨들고 순식간에 뛰어나갔다. 비상식량으로 쓰는 초콜릿 바와 쿠키, 500mL짜리 생수병을 3개씩 챙겼다. 새빨간 SUV 차량이 사이렌을 울리며 산으로 향하는 도로를 질주했다. 50여분을 달리자, 남설악 오색리 흘림골 입구가 나타났다.

  설악산은 대청봉을 중심으로 설악산맥과 서북주릉, 화채능선으로 나뉜다. 서쪽은 내설악, 동쪽은 외설악, 남쪽은 남설악이다. 설악119산악구조대는 외설악과 남설악을 담당한다. 대원 10명이 5명씩 2교대로 지킨다. 바쁜 10월에는 속초소방서에서 2명을 지원한다.

 

  차량이나 헬기가 닿지 못하는 산속에서 부상자나 조난자가 생기면 대원들이 업고 내려와야 한다. 조난자를 찾아 산중을 하염없이 헤매야 할 때도 있다. 대청봉은 해발 1708m다. 곳곳이 바위라 오르고 내리기가 쉽지 않은 산이 설악산이다.

 

  흘림골에서 20여분을 오르자 여심폭포가 나타났다.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얘진 거구의 노인 정모(69·경기도 용인시)씨가 바위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등산 전 급하게 먹은 인절미가 화근이었다. 급체를 한 듯 정씨는 얼마 오르지 못해 주저앉았다. 몸무게 61㎏인 지영석(35) 대원이 82㎏ 나가는 정씨를 번쩍 업었다. "이젠 단련이 돼서 별로 힘들지 않아요. 100㎏ 가까운 환자도 업어봤는데요."

 

  지 대원이 지치면, 72㎏의 김영일(34) 대원, 70㎏의 조경근(25) 대원이 정씨를 번갈아 업었다. 세 사람이 노인을 업고 낙엽을 피해 한발 한발 힘겹게 산길을 내디뎠다. 김 대원은 "무릎이 튼튼해야 한다는 생각에 도가니탕을 자주 챙겨 먹는다"며 웃었다. 오후 12시53분, 대원들은 구급차량에 정씨를 인계하고 사무실 옆 식당에서 불고기 전골로 늦은 점심을 해치웠다.

 

"슬슬 긴장합시다. 벌써 2시30분이네."

 

  사무실로 돌아온 김 대원이 말했다. 그는 "오후가 되면 등산객의 신고가 부쩍 늘어난다"고 했다. 하산길에 도저히 못 걷겠다며 SOS를 치는 이들이다. 김양수(48) 대장은 "신고 즉시 무조건 출동하는 것이 원칙"이라고 했다.

 

  "아무런 준비 없이 험한 설악산을 찾았다가 내려가기 힘들다며 신고하는 분들이죠. 병원 대신 주차장까지 데려다 달라는 분도 많습니다."

 

  오후 3시18분쯤 대원들은 신흥사 입구에서 넘어진 아이를 살펴보고 돌아왔다. 1시간도 되지 않아 남설악 오색리 주전폭포에서 다리가 부러진 것 같다는 김모(48)씨의 연락이 왔다. 긴급 출동했지만 다행히 "알아서 구급센터 차량이 있는 곳으로 내려갔다"는 연락이 왔다.

 

  설악산에 어둠이 내리기 시작했다. 오후 5시34분, 또 신고가 들어왔다. "무릎 관절이 아파 도저히 못 내려가겠어요." 비선대에 있다는 이모(49)씨였다. 7인승 구조차량이 덜컹거리며 산길을 달렸다. 컴컴한 등산로에 헤드라이트 불빛을 쏘자 머리카락이 땀에 흠뻑 젖은 초췌한 얼굴의 등산객들이 "태워달라"며 곳곳에서 손을 흔들어댔다.

 

  저 멀리 이씨의 모습이 보였다. 이씨의 부인은 남편과 함께 차에 오르면서 "단풍은 구경도 못했다. 앞으로 설악산엔 죽어도 안 온다"고 소리쳤다. 김 대원이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 "설악산을 미워하지 마세요. 산은 그대로 있어요. 힘들고 다치는 것은 사람이 준비를 못한 탓이죠."

 

  오후 7시16분, 마등령(1327m)정상에서 신고가 들어왔다. 랜턴 없이 산에 오른 등반객들이 해 저문 산속에서 오도 가도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등령은 비선대에서 금강굴을 거쳐 2시간40분을 올라야 하는 코스다. 후드둑 빗방울이 떨어졌다. 대원들은 비에 젖어 미끄러운 바위길을 2시간30분 동안 뛰다시피 올랐다. 김석광(60)·심윤식(59)·노영기(54)씨가 추위와 두려움에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반갑습니다!" 진한 고마움이 배어 있는 목소리였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무섭고, 날은 추워지는데….''과연 와줄까'' 싶었어요." 이들은 25일 자정을 넘겨서야 산을 떠날 수 있었다.

 

  설악119산악구조대는 작년 한 해 동안 273번 출동해 363명을 구조했다. 이들의 1년 경비는 인건비와 유류비, 등산장비 등을 합쳐 4억5074만원이다. 신고를 받아 한 번 출동하는 비용이 165만원인 셈이다. 조경근 대원은 "세금 냈으니 주차장까지 데려다 달라는 분이 간혹 있지만, 생명의 은인이라며 눈물을 뚝뚝 흘리는 분도 적지 않다"고 했다.

 

  "대원들 등에 업혀 산자락을 내려갈 때, 업고 가는 우리가 뿜는 거친 숨소리를 들으셨기 때문일까요?"

 

★ 조선일보 2009. 10. 27(화) 11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