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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방관들 "만에 하나…" 목숨 건 출동
지난달 15일 서울 도봉소방서에 다급한 목소리의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현관문 좀 열어주세요. 집 안에 분명 사람이 있는데 인기척도 없고, 전화도 받질 않아요. 자살했을지도 몰라요." 신고 직후 119 구조대원 6명이 도봉구 창동의 한 빌라로 달려갔다. 하지만 부부싸움 후 부인이 문을 열어주지 않자 남편이 문을 열기 위해 거짓 신고한 것으로 드러났다. 소방 관계자는 "숨 넘어가는 목소리로 연기를 하니 출동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단순 생활민원에 대해서는 소방관이 출동을 거부할 수 있도록 한 119 구조구급에 관한 법률 개정안이 지난달 9일부터 시행되고 있다. 하지만 개 고양이 같은 동물 구조, 현관문 개방 등 생활민원 신고 및 출동 건수는 전과 다름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소방대원들이 위험에 노출되는가 하면 소방력 낭비가 여전하다는 지적이다.
이번 법 개정은 지난 7월 한 소방대원의 안타까운 죽음이 계기가 됐다. 주택 난간에 고립된 고양이를 구해달라는 신고를 받고 출동한 속초소방서 119구조대 소속 김종현(29) 소방교가 구조 과정에 9m 아래 바닥으로 추락해 사망했던 것. 하지만 소방관은 화재진압, 인명구조, 훈련 중 순직의 경우에만 국립묘지 안장 대상이라 결국 김 소방교는 국립묘지에도 묻히지 못하게 됐다.
이 사건을 계기로 "쓸 데 없는 일에 소방력을 낭비해선 안 된다"는 여론이 일었고, 때마침 법 개정도 이뤄졌다. 소방방재청은 "동물구조, 문 개방 요청, 비응급성 신고 등의 경우엔 출동하지 않겠다"고 공언했다. 하지만 한 소방관은 "만에 하나라도 잘못되면 어쩌나 하는 마음에 신고를 받고 출동을 거부할 수만은 없는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2일 서울종합방재센터에 따르면 개정안 시행 후 지난달 말까지 서울 소재 소방서에 접수된 동물구조 신고 837건, 단순 문개방 요청 377건 등 생활민원성 신고가 1,200여건에 이른다. 실제로 황당하고 위험한 동물 구조 민원에 출동하는 경우도 빈번하다. 서울 강북지역의 한 소방서 관계자는 "현관에 들어온 비둘기를 치워달라는 신고나 지붕 속에서 아기 울음 같은 고양이 소리가 들리는데 해결해달라는 신고가 많았다"며 "천정 위에는 삐죽삐죽 튀어나온 못과 여기저기 잘린 전깃줄이 가득해 부상, 감전 위험에도 불구하고 무사히 고양이를 구했지만 한편으론 씁쓸했다"고 말했다.
비용을 아끼기 위한 생활 민원성 신고가 끊이지 않자 소방관들의 스트레스와 피로는 극에 달하고 있다. 방재센터 관계자는 "신고를 받은 후 주간에는 20초, 야간엔 30초 내에 출동을 개시해야 하는데, 잦은 생활 민원에 구조대원들의 정신적 육체적 스트레스가 막심하다"며 "직업에 대한 회의를 느끼는 경우도 많다"고 전했다.
또 이로 인해 화재 등 정작 중요한 재난 현장엔 제때 출동하지 못하는 것도 문제다. 한 소방관은 "먼저 출동한 현장의 상황을 처리하지 않은 상황에서는 소방서로 복귀할 수 없어 정작 도움이 필요한 곳에 공백이 생길 수 있다"며 "시민의식 수준의 향상이 필요하지만 민원성 신고도 허위신고에 준해 과태료 부과 등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